도련님과 깍두기

“생각보다 늦었네? 길이 막혔어?” “아… 좀 늦었지. 미안.” “아냐. 일찍 왔으면 너 기다릴 뻔했다. 지금 겨우 다 했어.” 앞치마 두른 이민형이 내가 집에 들어오는 것과 동시에 가스 레인지에서 된장찌개 담긴 뚝배기의 귀퉁이를 잡아올렸다. 보글보글. 끓는 소리가 조용한 집을 채웠다. “손 씻고 와. 얼른 먹자.” 마음 같아선 밥이고 뭐고 집에 돌아가 엄...

술에 취해 담배를 피웠고. 고백 끝엔 키스를 했고. 돌아온 방에서 난 울었다. 이유는 모르겠는데 자꾸만 눈물이 나서. 그럼 이민형은 아무말없이 이부자리를 펴고 나를 눕혔다. 평소처럼 이 닦으란 잔소리도 안 하고 옆에 누워 새벽 내내 조용히 내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달랬다. 괜찮아. 괜찮아. 무엇에 대한 위로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깊게 파고들지 않기로 했다. ...

“와… 너랑 이러고 있으니까 고딩으로 돌아간 것 같아, 지금. 엄청 이상하고… 신기하다.” 고개를 끄덕이는 나재민의 얼굴 위론 지나간 기억을 되새기는 반가움이 아주 잠깐 스쳤다. 이동혁이랑 한 집에 살던 복잡하고 묘한 사이가 타의로 도하고 전교생에 까발려지고 나선 누가 쳐다보든 말 이동혁이랑 같이 밥을 먹었지만, 그 전까진 혼자 밥 먹는 날 안쓰럽게 여긴 ...

“왜 손도 안 대? 나만 먹는 것 같아.” 고개를 갸웃거리던 이민형이 반질거리는 참치 한 점을 집어 내 앞접시에 내려놨지만 먹을 생각은 전혀 안 들었다. 점심도 안 먹어서 분명 배가 엄청엄청 고팠는데. 일부러 큰 맘 먹고 비싼 호텔 일식당까지 예약한 건데. 도영 쌤과 마주친 이후로는 거짓말처럼 허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동혁이, 사라졌어. 어디로? 왜? 언...

엄마가 죽었다. 엄마와 죽음.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는 엄마의 몸 위로 하얀 천이 덮이고 장례식장으로 장소를 옮기고 나서도 머릿속에서 하나로 섞이지 않고 겉돌기만 했다. 의사의 사망 선고를 들으면서도 아무 실감도 나지 않았다. 미동도 없이 중환자실에 누워만 있던 시간이 벌써 한 달이라. 죽은 상태와 살아있는 상태가 크게 다르지도 않아서 더 안 믿겼다. 조금...

* 아직 1부를 읽지 않으신 분들은 스포가 될 수 있습니다 !! * 당연한 얘기지만 글 속 묘사와 제가 찾아온 이미지가 100% 일치하진 않으니 적당히 분위기만 참고해주세요 !! 이정 그룹의 저택은 크게 세 건물로 분류됐다. 하나는 회장님과 사모님, 결혼했다 지독한 놈한테 걸려 독신으로 돌아온 이정 푸드의 대표인 첫째 딸이 주로 지내는 본채, 하나는 결혼...

“괜찮아? 다친 데 없어?” 빨간 손 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채 부어오른 손목을 들여다보며 살짝 인상을 찌푸리던 이민형이 잠시 갓길에 차를 댔다. 잠시 기다리라더니 편의점에 들어가 한 손엔 핫팩에, 다른 한 손엔 얼음 주머니를 들고 돌아왔다. 찜질을… 뭘로 해야 될지 몰라서. 많이 아파?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에 그제서야 마음을 좀 놓이면서 다시 눈물이 차올랐...

돈은 좀 아까운데 다른 방법이 있나. 그냥 써야지. 의심은 하나도 안 해서 쉽긴 해. 뭐, 다치게 하고 싶진 않고… 내 인생 꼬인 값. 그 여자한테 그것만 받아내면 끝이지. … 직접 찾아가? 미쳤어? 그 여자 성격 어떤지 모르지? 사람 무시하고 지 잘난 맛에 사는 여자야. 따박따박 훈계질 해대는 거 또 들었다간…… 주변을 둘러보는 게 날 찾는 거라 생각했는...

“뭐야…? 나 여기 있는진 어떻게 알았어?” “춥다. 우선 타서 얘기해.” 귀신 보듯 훑어보는데도 이민형은 태연하기만 했다. 얼른 타라니까. 턱짓으로 조수석을 가리키며 재촉하길래 결국 차에 올라탔다. 이미 따뜻하게 데워진 온열시트와 히터 바람이 노곤하게 녹아있는 차 안에 들어서는 순간 긴장이 쭉 풀렸다. “와… 좋다. 얼어죽는 줄.” “그러게 왜 이 추운 ...

“딸은 만났어?” “아직. 이번주 내로 찾아갈 생각이야.” “걸음마도 못 뗐을 때 헤어졌다며. 형씨 기억도 못 할 텐데. 뭘 믿고 그렇게 확신해?” “그래 봐야 아직 어린 애야. 애 엄마 성격상 분명 엄하게 키웠을 텐데 한 몇 달 잘해주면 홀랑 넘어오지.” “근데 아무리 지 엄마가 돈이 많다고 해도 돈을 턱턱 내줄까? 아직 고등학생이면 용돈 받아 쓸 텐데....

“야… 자냐?” 심장이 멈추는 것만 같았다. 문 밖에 선 이동혁이 나와 똑같이 문고리를 잡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시야가 아찔하게 번쩍 튀었다. 곧바로 문고리를 놓고 크게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하필 안고 있던 문제집을 품에서 놓쳤다. 고작해야 책일 뿐인데 문제집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소리가 고요한 와중에 꼭 커다란 바위덩어리가 묵직하게 내려앉는 것처...

이민형의 출생에 관련된 스캔들이 한참 세간을 떠들썩하게 뒤집었고, 이정은 평판에 큰 타격을 입었다. 그래도 해명과 반박 기사들을 통해 어느 정도 수습이 되어가던 중이었지만, 이민형의 어머니가 극단적인 선택을 하시면서 이미지는 결국 곤두박질쳤다. 자살이 아니라 사주된 살인이라는 데에 사람들의 의심이 쏠리며 이정호텔을 비롯한 이정그룹 전반의 자회사들의 주가도 ...